대한민국에는 군사적인 목적으로 파인 굴이 몇 개 있는데, 그것은 북한이 땅굴을 팠기 때문이다. 남침용 땅굴이라고 한다.
현재까지 발견된 북한이 판 남침용 땅굴은 총 4개이다. 그 중 3개는 관광자원화되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구경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북한군이 열심히 팔 때마다 남한에서 관광명소가 되는 웃긴 일이 벌어진 셈이다. 안보관광 코스로 판문점에 단체관광을 간다면 꼭 들르게 되는 곳이다.
단 땅굴 관광시에는 카메라나 캠코더 같은 촬영 기능이 있는 전자기기의 소지가 금지되어 입구의 보관함에 맡기고 들어가야 한다. 어차피 저런 촬영 장비를 가지고 들어가봤자 땅굴 자체가 최소한의 조명만 설치된 어두운 지하라서 화질이 선명하게 나오지도 않으며 통로가 좁아 촬영한답시고 한 곳에서 지체한다면 그만큼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방해하게 될 뿐더러 땅굴 대부분이 높이도 낮아서 키 작은 사람이 아닌 이상 몸을 조금이라도 숙여야 지나갈 수 있기에 촬영하기도 불편하다. 거기다 땅 속이라 그런지 대개 암석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자칫 잘못하면 장비에 흠집이 크게 생기거나 장비 자체가 망가질 수가 있기 때문에 몰래 가지고 들어갈 이유가 없다.
혹여라도 "이 땅굴을 거슬러 올라가면 북한에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을 위해 설명하자면 당연히 못 간다. (가이드라고 불리는) 경계병력을 따돌려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한국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진작에 경로 곳곳을 공구리쳐서 막아놓은지 오래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 입장
1998년에는 남침용 땅굴 징후가 있는 21곳 가운데 개연성이 높은 7곳(서부전선 5곳, 동부전선 2곳)에 대해 시추작업을 벌인 바 있다. 그러나 추가적인 땅굴을 발견하지는 못했고, 2000년 이후 북한 귀순자로부터 남침용 땅굴에 대한 22건의 첩보를 입수해 14곳에 대한 탐사작업을 벌였으나 이 때에도 땅굴을 발견하지 못했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도 4∼5차례 땅굴 탐사작업을 벌였으나, 역시 확인하지 못했다.
매년 봄, 가을철 위주로 전방 지역에 대한 땅굴 수색 작업을 계속 하고 있다. 여름은 무더위와 장마철, 말라리아 우려로, 겨울은 혹한기라서 제외.
이미 발견된 땅굴을 은폐하거나 수십개의 장거리 땅굴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으나, 최전방 지역에 파놓은 땅굴은 여러개가 있을 것으로 본다는 것.
땅굴을 발견하기가 힘든 이유는 북한이 1970년대에 땅굴을 파놓았고 탐사작업에 대응해 매립 등 역대책을 시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관련해 제1군사령관 시절 제4땅굴을 직접 발견한 18대 국회의원 이진삼은 2009년 국정감사에서 한민구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20년 동안 왜 발견하지 못하냐고 말하며, 직접 땅굴팀에 복무할 의향도 있다고 말했다.#
제4땅굴이 확인되기 하루 전인 1990년 3월 2일, 이상훈 당시 국방부장관은 국회 본회의(임시회)에서 땅굴 탐사 작업은 계속 진행 중이라며 북한의 남침 땅굴은 20개 이상이 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30일 국방부 정례 브리핑에서도 김민석 국방부 대변인은 국방백서를 통해 전방 지역에 20개 정도의 땅굴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이를 재확인했다.#
육군에서는 지금도 매년 병사를 차출해 DMZ에서 땅굴 조사작업을 벌이고 있다. 전방사단에서 복무한다면 차출될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공병, 수색 병과라면 더더욱.
현지 부대의 간부가 하는 말에 따르면 조사지에 천연동굴과 공동(空洞)이 워낙 많아서 땅굴인줄 알고 계속 파보니 그냥 공동이더라는 경우가 꽤 많은 것 같다.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1974년 11월 5일. 대한민국 육군 제25보병사단 담당 구역인 연천군 고랑포에서 동북방 8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첫 번째 땅굴은 너비 90cm에 높이 1.2m, 깊이는 잔디가 죽지 않을 정도인 250cm에서 450cm[1], 길이 약 3.5km에 달하는 콘크리트 구조물로, 이 땅굴의 위치는 서울에서 불과 65km 거리에 위치해[2], 1시간에 1개 연대 이상의 무장병력이 통과할 수 있고 궤도차를 이용하면 중화기와 포신(砲身)도 운반할 수 있는 규모의 땅굴이다.
군사분계선 남측을 순찰하던 중 지표면에서 증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육군 일병 이상록이 발견했고, 이에 구정섭 중사가 이상이 있음을 직감하고 굴토 작업을 명령했다. 구정섭 중사는 월남 파병 경험이 있어서 직감적으로 땅굴임을 의심했다고 한다. 이에 북한측 초소에서 300여발의 기관총 사격을 가해왔으며, 아군 측도 응사하면서 약 1시간 15분 동안 교전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아군 육군 병 3명이 전사하고 5명이 부상했으며, 구정섭 중사에게 을지무공훈장, 이상록 일병에게 충무무공훈장, 분대원 7명에게는 화랑무공훈장이 수여되었고 1계급 특진 등의 포상이 주어졌다.
땅굴 발견 후 15일째인 11월 20일, 한국 육군·해병대 2명과 미 육군·해군 6명 등 8명으로 편성된 공동 수색조가 땅굴의 구조와 제원을 정밀하게 조사하기 위해 땅굴 안에서 수색작전을 전개하던 중 군사분계선 남쪽 300m 지점에 이르렀을 때 콘크리트 벽이 나타났고, 그 앞에 북한군이 매설한 부비트랩을 건드려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이 폭발로 작업 중이던 대한민국 해병대 김학철 소령과 미 해군 장교 로버트 맥퀸 벨린저(Robert MacQueen Ballinger) 중령이 순직했고, 미 육군 5명과 한국 육군 1명 총 6명이 부상당했다.
로버트 맥퀸 벨린저 중령, 1933년 7월 28일생.
1976년부터난 일반 관람이 허용되었지만 12년 만인 1988년에 중지되었다. 휴전선 남방한계선을 불과 800m 남겨놓은 완전 최전선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다른 땅굴과는 달리 심도가 얕고 높이가 1m 내외로 관람을 계속 허용하기에는 안전성 문제가 있어서, 지금까지 공식 발견된 땅굴들 중 유일하게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고 있다. 대신 모형을 관람할 수는 있지만 이 모형은 갱도 몇 미터 정도만 재현하고 안에 갱차 하나만 세워놓은 형태이므로 모형으로 관람을 대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땅굴이 대충 이런 형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다. 실제 땅굴을 관람하고 싶으면 2, 3, 4땅굴로 가자.
당시 노획된 장비들을 보면 먹다 만 밥과 반찬이 그대로 든 반합도 있다. 지표면과 워낙 가까워서 사람이 삽으로만 파도 도달할 수 있는 깊이였던지라 아무래도 한창 파던 중에 들키면서 서둘러 달아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새어나오던 증기의 정체는 작업하던 북한군이 꼬부랑국수를 먹다가 올라온 김이었다고 하며, 수색조가 작업을 시작하자 사람들이 황급히 도망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하니 양측 군인들이 정말 지척에 있었던 것이다. 전선, 갱도차와 레일 또한 그대로 남아있었다. 벽에는 작업 일정이나 '속도전', '통일로'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일부 지점에서는 '보임'이라고 적혀 있고 천장이 뚫려 있는데 이곳은 머리를 내밀고 남측 초소를 지켜볼 수 있는 위치다.
1975년 3월 19일, 육군 제6보병사단 담당 구역에서 경계근무를 하던 병사가 지하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을 들으면서 발견된 제2땅굴은 해외에서 수입한 현대식 굴착장비를 이용해 지표 45m 아래의 단단한 화강암을 뚫어놓은 것으로, 제1땅굴보다 규모가 더욱 컸다. 철원군 북방 13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된 이 땅굴은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킬 수 있는 광장까지 갖추어 놓았고, 남쪽 출구는 세 갈래로 나뉘어 있다. 1시간에 1만명의 무장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으며, 차량ㆍ야포 등과 함께 전차까지 통과할 수 있는 규모이다. 너비와 높이 2m, 길이 3.5km, 지하 50~160m.
제1땅굴을 발견한 이후 한국과 미국은 이런 땅굴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항공사진 등을 토대로 땅굴이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한국군 및 주한미군 공병대와 미국 민간기술진까지 참여한 탐사팀은 3개월간 45개의 시추공을 뚫어 땅굴의 존재를 확인했다. 화강암 특성 상 내부에 빈 공간이 생길 수가 없는데 채굴한 시추석들이 일정하게 짧았던 것이다. 또 채굴 도중 모래가 나왔는데 강원도 산골에선 나올 수 없는 바다 모래였고, 화학실험을 해 보니 시추석들에서 전부 화약성분이 검출됐으니, 100%였다. 땅굴을 막기 위해 남측에서 땅굴의 허리 부분을 관통하는 역갱도 작업을 실시하여 땅굴의 좌측면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당시 군에는 화강암을 굴착할 정도의 전문 장비가 없었으므로 현대건설의 도움을 받아 중장비들을 사용했다. 땅굴 내부에는 북한군이 철수하면서 시간을 끌기 위해 쌓아놓은 벽이 총 3개 있었고, 이 돌들도 화강암이 아닌 밖에서 가져온 다른 지역의 돌이었다고 한다. 이 돌벽을 철거하던 도중 북한이 매설한 부비트랩을 건드려 1975년 4월 8일 한국군 장병 7명이 전사했다. 이후 5월 28일엔 또 1명의 전사자가 생겨 제2땅굴 수색 과정에서 총 8명[3]이 희생당했다. 7월 20일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이곳 입구에 제2땅굴 위령비를 세웠다. 북한군은 제1땅굴의 교훈인지는 몰라도 지난 번과 달리 철수까지 비교적 시간이 있었던 모양으로 자신들의 짓임을 감추기 위해 전기설비나 선로, 지지대 같은 자신들의 흔적을 최대한 없애고 도망갔다. 하지만 위의 기록영상이나 당시 참여한 사람들의 수기를 보면 미처 치우지 못한 지지대라던지 발파용 다이너마이트를 뇌관을 꽂아서 벽에 박아둔 채로 두고 가는 등, 마지막까지도 계속 굴착 작업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철의 삼각 전적지 개발 계획'에 따라 철원군에서 운영하는 안보관광코스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반인도 볼 수 있다. 총길이 3.5km 중 500m가 개방되어 있다. 고석정에서 출발하는 코스와, 백마고지역에서 출발하는 코스 2가지가 있다. 둘 다 유명한 철원 노동당사와 월정리역이 코스에 들어 있다. 총 소요시간은 3시간 정도. 민간에 공개된 구간 끄트머리는 비무장지대 안쪽 지하에 위치하고 있어, 간접적으로 비무장지대를 밟아볼 수 있는 셈이다. 보다 안쪽까지도 육군이 수색을 끝냈고 완전히 막혀 있지 않기 때문에 철문을 설치하고 경계병을 배치했으나, 근무자들의 심적 피로가 극심하고 기습공격 시 생존이 어렵기에 경계병을 철수시키고 무인감시장비들을 깔아 놨다.
3, 4 땅굴은 곧 정리해서 포스팅 하겠습니다.
남침용 땅꿀이라니 로켓트만 잘 만드는 줄 알았는데 터널 길도 잘 만드네요.
어휴.. 대한민국 터널 기술력과 북한 땅굴 기술력 합쳐지면 참 좋을텐데 말이죠.. 음...
굴 파는 기술이 아주 우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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