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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카이스트에 대해서 한국과학기술원

by 빛나는맛과탕 202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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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출처

핵심가치
도전 창의 배려
Challenge Creativity Caring
비전
글로벌 가치창출 선도대학
Global Value-Creative Leading University
국가
대한민국
분류
설립
총장
제17대 이광형
법인
한국과학기술원
캠퍼스
본원
문지캠퍼스
서울캠퍼스
도곡캠퍼스
재학생
학사
3,665명(2022년)
석사
3,229명(2022년)
석박통합
1,396명(2022년)
박사
2,769명(2022년)
교직원
교수
666명(2022년)
직원
908명(2022년)

 
   
한국과학기술원 | KAIST

Korea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


깊이 있는 이론과 응용력을 갖춘 과학기술 인재를 양성하고 과학기술 혁신을 위한 기초연구, 융복합연구, 산학연 협업을 수행하는 대한민국의 고등교육기관. 대외 공식 명칭으로 영어 약자인 'KAIST'를 사용하며, 불가피하게 한글로 표기할 시에도 '카이스트'로 표기한다.[1]

본원과 문지캠퍼스[2]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서울캠퍼스[3]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도곡캠퍼스[4]는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다. 부설 기관으로는 서울캠퍼스에 고등과학원(KIAS), 본원에 나노종합기술원(NNFC), 부산광역시 부산진구에 한국과학영재학교(KSA)가 있다.
 
나무위키 출처

1966년 ~
1971년 ~
1981년 ~
1984년 ~
1989년 ~
1997년 ~
2009년 ~
KIST
KAIST
KIST
 
KAIS
KAIST
KAIST
 
KIT
 
ICU
 

 

KAIST는 한국과학원(KAIS)를 전신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와 통합·분리, 한국과학기술대학(KIT),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와 통합한 복잡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카이스트 전경 나뮈위키 출처

 

 
한국과학기술원법 제1조(목적)

이 법은 산업발전에 필요한 과학기술분야에 관하여 깊이 있는 이론과 실제적인 응용력을 갖춘 고급과학기술인재를 양성하고 국가 정책적으로 수행하는 중ㆍ장기 연구개발과 국가과학기술 저력 배양을 위한 기초ㆍ응용연구를 하며, 다른 연구기관이나 산업계 등에 대한 연구지원, 기술의 이전 및 사업화를 촉진하고 창업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과학기술원을 설립함을 목적으로 한다.

 
1960년대말 대한민국의 산업은 노동집약적 경공업 육성에서 기술집약적 중공업 기반 산업화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공계 대학교육은 열약한 상황이었고, 대학원은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특히 많은 인재들은 미국 등 선진국에 유학을 떠났고, 다시 국내에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 두뇌 유출을 막기 위해 설립된 것이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이다.

1968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는 ‘이공계대학 및 대학원 육성방안에 관한 조사 연구’라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 뉴욕공과대학의 정근모 교수는 미시간 대학교에서 공부할 당시 지도교수였던 존 해너(John Hannah)가 미국국제개발처(USAID) 처장으로 임명되자, '한국의 새로운 응용과학기술 대학원 설립안'을 USAID에 사업계획서로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해너 처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로운 이공계 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서한을 보냈고, USAID 차관을 바탕으로 한국과학원 설립이 추진된다.

1970년 4월 8일 월례 경제동향 보고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정근모 박사의 바탕으로 과기처의 과학기술대학원 독립 신설안을 추진할 것을 지시했다. 경제기획원·문교부·과기처의 차관, KIST 부소장 및 여러 명의 대학교수로 구성된 과학원 설립 실무위원회가 발족되었고 한국과학원법이 1970년 7월 16일 국회에서 의결되었고, 8월 7일 공포되었다. 이 특별법은 자율성 보장, 출연금 지급, 병역 특별조치 등의 파격적인 조항을 통해 재정 및 제도적 독립과 안정성을 강력하게 지원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제도적 뒷받침이 오늘날까지 KAIST의 학풍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1970년 5월 11일 과기처 장관은 부총리  경제기획원 장관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과학원 설립에 소요되는 외자를 조달하기 위해 USAID에 600만 달러 규모의 장기교육 차관을 요청했다. 설립자금을 지원키로 한 미국은 한국과학원 설립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실리콘밸리의 아버지로 알려진 전 스탠퍼드 대학 부총장 터만 박사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파견했고 최종적으로 한국에서 요청한 교육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1971년 2월 16일 KAIS가 설립등기되고 18일 창립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한국과학원의 설립부지는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홍릉 일대 서울연구개발단지로 결정되어 1973년 완공되었다. 처음 신입생이 입학한 것은 1973년 3월이었고 그 해 9월 17일, 한국과학원의 공식적인 첫 강의인 1956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월터 하우저 브래튼 박사 초청 개강 특별 기념 강연이 열렸다.

<미래의 꿈>은 미국 실리콘밸리의 아버지 프레드릭 터만 박사가 미국 국제개발처 타당성 조사단장 자격으로 대한민국에 방문한 후, 한국과학원 설립에 필요한 차관 제공을 위해 1970년 작성한 「한국과학원 설립에 관한 조사 보고서」[5]의 마지막 장의 제목이다. 터만 박사는 설립 30주년을 맞을 무렵인 2000년경의 KAIST를 다음과 같이 예견했다.
국제적인 명망을 가진 이공계 교육 기관으로 성장해 학계의 본보기가 되는 학교
학문적 역량을 자체적으로 개발해 교육계에 새로운 기원을 이룩하는 첨병의 임무를 수행하는 학교
정치와 경제 각 분야의 리더를 배출하는 학교
한국인 생활 수준의 향상에 크게 이바지하는 학교

경영 효율화를 이유로 신군부 주도 하에 정부출연연구기관의 통폐합이 이루어지면서 1981년 1월 5일, 한국과학원(KAIS)과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통합되어 한국과학기술원(KAIST)으로 발족하게 되었다.[6] KAIST는 학사부와 연구부로 구성되었다. 메트릭스 체제를 통해 학사부와 연구부를 통합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실패했고, 학사와 연구 각각의 기능 중심체제로 변경됐다. 메트릭스 시스템 등 다양한 방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다른 두 기관의 통합은 갈등을 불러왔다. 1988년 독립적으로 연구부 기능을 재정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1989년 6월 12일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설립되어 분리·독립했다.

1982년 11월 29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부총리 노동부 장관에게 “최신 첨단 기술 분야의 고등 교육기관의 설립을 검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83년 2월 노동부는 설립계획을 확립하였고, 1984년 1월 대학 설립에 대한 문교부의 승인이 떨어졌다. 대학의 명칭은 한국산업기술대학으로 예정되었고, 위치는 대덕연구단지였다. 그러나, 한달 뒤 전두환 대통령은 "과학고등학교, KAIST 영재 교육과정, 한국산업기술대학의 효율적 통합 운영 방안을 검토하라”는 지시하였고, 3월에는 “KAIST와 한국산업기술대학의 계획안을 통합하여 과학기술대학으로 변경하여 설립하라"고 하였다. 이후 1984년 12월 31일, 부설 과학기술대학 설치를 위해 한국과학기술원법이 개정되고 이듬해 최순달 박사가 초대 학장으로 부임하였다. 1985년 6월 한국과학기술대학(KIT)이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설립되었으며, 1986년 첫 신입생이 입학하게 되었다. KIT는 학력고사를 거치지 않고 특차전형을 실시하였고 무학년 무학과제를 통해 우수한 재능을 가진 학생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88년, 연구 기능은 서울에 잔류하고 학사기능은 대덕으로 이전해 과학기술대학과 통합하는 계획이 노태우 대통령에게 보고되었다. 당초 대덕분원 계획에 따라 1987년부터 KAIST 대덕캠퍼스의 건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1989년 KIT는 한국과학기술원 과학기술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KAIST와 통합되었다. 1990년 3월 2일, KAIST 대덕캠퍼스 현판식이 이루어졌고, 1992년까지 단계적으로 대덕 이전이 진행되었다. 현 본원의 북측 지역이 과거 KIT의 캠퍼스이고, 동측, 서측이 KAIST의 이전으로 건설된 부분이다.

KAIST는 세계 초일류의 연구중심 교육기관을 비전으로 성장을 계속하였다. 1993년, 미국 교육부 인정 공학교육 평가기관(ABET)의 평가에 따르면, KAIST는 석·박사 과정의 수준이 미국 대학의 상위 10% 이내의 수준이며, 학부과정은 30% 이내의 수준으로 평가 받았다. ABET 평가단은 KAIST가 '최고 수준의 교육 및 연구 기관(A First Quality Institute)'이며, '교수의 질이 우수하고 적절한 규모의 실험 기자재가 갖추어져 있으며 학생들도 매우 도전적이고 향학열이 아주 우수한 집단'이라 평하였다. 90년대 말, 사이언스 네이처는 "한국의 대표적인 이공계 대학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교육기관이 될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KAIST를 소개했다.

한편, 서울의 기존 홍릉캠퍼스는 서울분원이 사용하였다. 1992년 설립된 서울분원은 기업체나 연구소에 근무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서울분원은 발전의 한계를 맞이해 1996년 신입생 모집이 중단되었고, 같은 해 그 자리에 테크노경영대학원과 고등과학원이 개원하였다.

2002년, 나노종합팹센터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어 2005년 3월 16일 나노종합팹센터가 본원 내에 설립되었다. 2013년 나노종합기술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고, 나노기술 연구와 교육을 수행하고 있다.

2009년 3월 1일에는 한국정보통신대학교(ICU)와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ICU는 정보통신부의 지원을 받고 있었는데, 사립대학교라 정부예산지원의 근거가 없어 운영이 어려워지자 KAIST와의 통합이 추진되었다. 이로써 ICU 캠퍼스는 문지캠퍼스가 되었고 KAIST의 IT 분야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다. 또한, 같은해 2월 6일 최초의 과학영재학교 한국과학영재학교(KSA)가 KAIST 부설학교로 전환되어 고등학교 단계에서부터 체계적인 과학 영재 교육 체계를 구축하였다.

 

 

 

 

 

 

 

거위 선생님들 보고 왔습니다.

 

 

 

 

 

 

카이스트 굿즈샾

 

도서관 전경
오리
사고싶었던 롤업 티셔츠 못삼.. 비싸더라구요^^
제순식당 카이스트 학생식당 아침 1번 손님으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인생설렁탕 냉면 이날 1번 냉면 손님이였습니다.

 


 

KAIST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관리감독을 받아서 교육부의 규제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입시정책과 정원 운용에 있어서 재량이 많아 타 대학의 입시와 다른 점이 많다. 수시모집 지원 횟수 6회 제한에 해당되지 않으며, 정시도 군외모집으로 가, 나, 다군에 관계없이 지원가능하다. 수능우수자전형을 제외한 모든 전형에서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를 유지하고 있다.

 

무학과 선발
학과 구분 없이 모집하며, 학생들은 입학 후 1학년 말에 학과를 자유롭게 선택한다(학과별 정원 제한 없음). 단,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제외이다. 입학 지원 시 1지망 학과로 무학과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 하며, 2지망 학과를 추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음. 전형 과정에서는 학과 선택 구분 없이 통합하여 평가됨. 합격자 발표 시 무학과 혹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소속이 확정되며, 1지망 정원을 초과할 경우 2지망 지원자에 한하여 2지망 학과로 배정될 수 있다.
모든 무학과 신입생은 1년간 새내기과정학부에 소속되어 기초 과목을 수강하게 된다. 1학년 마치고 학과 선택을 하여 가고 싶은 과에 가면 되니 전공 별 위화감도 없고, 점수 아까워서 하고 싶은 전공을 하지 못할 일도 없다. 또한, 학과 선택에 제한이 없어 해당년도 입학생의 관심사에 따라 학과 인원이 크게 변동되기도 한다. [11] [12] 단, 반도체시스템공학과는 삼성전자 계약학과로, 무학과 선발의 예외이다. 입학 지원 시 1지망 학과로 “무학과”와 “반도체시스템공학과”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하며, 2지망 학과를 추가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전형 과정에서는 학과 선택 구분 없이 통합하여 평가된다.[13]

 

입학 정원과 추가합격
타 대학과 다르게 KAIST는 입학정원보다 더 적은 학생을 뽑거나 더 많은 학생을 뽑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교육부 소속의 대학은 입학정원을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의 KAIST는 해당 규제에서 벗어나 있다. 따라서 KAIST는 입학 자격을 갖춘 학생이 많이 지원한 해에는 정원을 넘겨 학생을 선발하지만, 그렇지 않은 해에는 정원을 채우지 않기도 한다. 2021학년도 입시를 예로 들면 수시 일반전형은 550명 정원에 558명을 선발했지만, 수능우수자전형에는 15명 정원에 단 4명만 선발하는 등 정원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로 학칙상 KAIST는 학사과정 학생을 총 970명까지 선발할 수 있으나 입학정원은 보통 800여 명 정도이다. 추가합격은 일반적으로 단 1번 발표하며, 추가모집은 실시한 전례가 없고, 편입학은 과거 실시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입학지원자격 심사
수학 및 과학분야에 재능이 탁월한 고교 2학년 재학생에 대하여 과학영재선발위원회의 심의로 KAIST 학사과정 입학 지원자격을 부여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학교장추천서, 학교생활기록부, 성적증명서, 우수성 입증자료 등 서류를 바탕을 학생을 심사하여 KAIST에 지원할 수 있게 한다. KAIST에 합격시 고등학교 졸업과 동등한 학력을 인정해준다.

 


학사과정 등록금은 한 학기에 3,433,000원이다. 그러나 장학제도로 인하여 등록금 전액을 내는 학생은 없다.
교비장학금: 모든 학생은 수업료 1,743,000원을 지원받는다.
과기인재장학금: 모든 1학년은 남은 수업료 1,690,000원를 지원받는다.
성적우수장학금: 2학년 이상 학생은 12학점 이상, 2.70/4.3 이상 조건을 만족하면 남은 수업료 1,690,000원를 지원받는다.

 


그 밖에도, 생활지원장학금, 특별지원 장학금, 학과우등 장학금, 학과발전 장학금이 존재하며, 대통령과학장학금, 국가우수장학금 등 교외 장학금을 수령하는 학생들도 많다.

위 장학금과 별개로 학사 학자금이 정규학기당 145,000원/월[53]이 지급된다.

석/박사과정에 경우 입학시 결정된 국비장학생, KAIST장학생, 일반장학생의 분류에 따라 장학금이 지급된다.

 


 

학부 입학생들의 연령대부터가 조기졸업으로 인한 18세의 미성년자에서부터 30살이 넘는 장수생 만학도가 섞여 있는데다, 앞서 언급된 무학과/무학년 제도로 인해 단체문화나 선후배관계가 옅은 편이다. 게다가 전과나 복수전공도 자유로우며 매우 많고, 군 휴학을 제외하고도 복수전공이나 잦은 전과, 창업휴학, 기타 사유로 학교를 5~6년 이상 다니는 사람은 흔하며, 심지어는 입학에서 학부 졸업까지 10년 이상 걸리는 사람도 잊을 만 하면 한 명씩 나오므로 학번이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무학과 선발제도가 학생사회면에선 굉장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이 제도 덕분에 타 대학에서 볼 수 있는 학과별 학생들 간에 차별의식 같은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이 때문에 과동아리, 학과 MT 등 각 학과별 친목 활동과 소속감이 적은 편이며, 친목 활동은 보통 동아리를 통해 이루어진다.

일반고보다는 과학고, 영재학교 출신이 학생의 다수를 차지하는데다가 1학년 때는 전공 없이 전원 공통 기초과목을 수강하는 KAIST의 특성상 1학년때는 자연스레 출신 학교별로 어울리는 경향이 있다. 이러면 당연히 非특목고 출신 학생들이 소외될 우려가 있는데, 이에 대응하는 非특목고 출신 학생들끼리의 커뮤니티도 존재한다. 일반고 일반전형 출신들의 모임 “정주행”, 일반고 학교장추천전형 출신들의 모임 “원티드”, 수능우수자전형 출신들의 모임 “새틀라이트”, 외국고전형으로 입학한 후기입학생 모임, 외국인 학생 모임 등이 그것이다. 이런 출신별 친목은 통합에 좋지 않기 때문에, 학교 차원에서 이를 최소화하기 위해 새터반 편성, 기숙사 배정, 기초과목 분반에서 최대한 학생들을 무작위적으로 섞으려 하고 동아리도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그래도 보통 1학년 때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출신 학교별 친목은 그래도 많이 사라지는 편이다.

 

휴가때 카이스트 방문해보았습니다. 부지가 첨 넓어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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